발견 이후 너무 아름답고 유명한 유물이라 어느 박물관이 소장할지 신경전이 거셌다. 심지어 연구단계에서 사진 한 장의 유출도 기를 쓰고 막았다고 한다. 결국,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다가 고향인 국립부여박물관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인 향로는 모조품,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 중인 것이 진품이다. 부여군, 국립부여박물관의 상징과도 같기에 외부 전시품으로 나가는 일은 거의 없다.
현 보험가액 추산으론 최소 300억, 복제품 가격도 약 500만 원이나 될 정도로 고고학적, 문화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국내에서 발견된 금속 공예품 가운데 가장 가치 있고 가장 빼어난 기술로 만들었다. 유물이 파손된 경우 고고학적 가치는 높으나 예술적 가치가 떨어질 수도 있는데, 금동대향로는 거의 온전한 형태로 발굴되었기 때문.
해외에서도 화제가 되었는데, 상기한 대로 일부 중국 사학자들은 '이것은 중국의 유물이다!' 하고 주장했다. 유물의 조형성이 수준 높기 때문에, 국내에서도 초기 연구단계 때는 중국에서 수입해온 유물으로 추측했다고 한다. 백제는 철저한 불교 왕국이었는데, 대향로에서는 오히려 중국적 도교의 영향이 더 크게 보인다. 백제금동대향로의 원형이 중국에서 유행하던 박산로(博山爐)라는 향로임은 분명하다. 중국에서는 박산로가 기원전 4세기 전국시대에 나온 초기형태로부터 훗날 중세시기 완성형에 이르기까지, 시대에 따른 박산로의 기술적 진화 모습이 모두 남아 전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런 대향로가 만들어질 수 있는 기술적 발전계통이 전혀 보이지 않고 갑작스레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완성품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최소한 중국인이 중국의 기술을 토대로 한국에서 만들었거나 아예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라 본 것이다. 이후 연구에서 이를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대장간 터가 발굴되며 백제가 제작한 유물로 판명되었다. 지금은 중국 학자 대다수도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면 모를까, 대향로가 중국의 유물이라는 소리는 어불성설이라고 이전의 중국 유물설을 일축한다. 백제금동대향로의 세련미와 조형요소의 다양성은 지금까지 출토된 중국의 모든 박산로를 압도하고, 일단 60 cm을 넘는 크기부터가 넘사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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