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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회.정치.역사.인물

도 넘은 일제의 석굴암 훼손

석굴암은 경술국치 직전 일본에 반출될 뻔하기도 했으나 현지 관리가 이를 거절하였고, 조선 총독 데라우치가 이곳을 시찰한 뒤 석굴암을 제자리에 두되 현지에서 보수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면서 한국에 남아있게 되었고 보수가 시작되었다. 이미 조선이 일본의 일부가 됐으므로 어디 있든 일본 정부의 재산이니 굳이 옮길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반출 대신 관리로 노선을 바꾸게 된 것이다. 1913년 10월부터 감개돌을 고정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으로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假構)를 설치하였고, 1914년 8월 말 돔형 지붕을 분리하여 완전 해체한 후, 1915년 5월 석굴을 재조립하는 등 1915년 9월까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복원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석굴암에 습기 문제가 생겼다. 석굴암이 있는 장소는 아주 습한 곳인데 수리 과정에서 불상을 습기로부터 차단하고 석병을 보강하기 위해 유럽이 자국의 문화재를 복원하듯 '당시의 최첨단 건축기법'을 도입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석굴 밖에 외벽이 세워졌고 외벽과 석굴 사이에 콘크리트가 채워졌다.

석굴암은 지하수 샘물이 솟아나는 암반 위에 있다. 샘물 때문에 석굴 바닥 온도는 본존불이 있는 위쪽보다 낮아 원래 이슬은 바닥에만 맺혔다. 수분은 0.1도 차이만 있어도 차가운 쪽에서 물 분자 이동이 저하돼 결로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신라 사람들은 알았고, 1천 년 이상을 버텨왔는데 일제가 이 땅속에 콸콸 흐르는 샘물을 아연관을 만들어 빼버리니 바닥의 온도가 높아져 정교한 조각이 있는 석굴 벽면표면에 결로가 생기기 시작, 잘못된 수리로 바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석굴 지하에는 솟아오르는 샘물이 있었는데 이건 아연관을 설치해 밖으로 빼버렸다. 그 결과 시멘트가 화강암을 손상시켰고, 석굴암의 상세한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로 공사를 강행하여 내부벽과 불상 표면에 엄청난 결로와 이끼가 나타났다.

1917년 누수 현상과 습기 등으로 바닥과 천장 위로 물이 스며드는 문제가 나타나자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천장의 방수를 위해 아스팔트를 바르고 석실 지하 아연 배수로의 방향을 바꾸는 보수공사를 실시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1927년에는 푸른 이끼를 없애기 위해 증기 세척을 했다. 당시 보수 공사 비용은 당시 돈으로 2만 2726원. 지금 가치로 대략 38억 원 정도 된다. 이끼가 또 생겨 1934년에도 증기 세척을 했고 거친 처리로 본존불을 비롯한 조각들이 많이 마모됐다.


일제가 복원하기 전의 석굴암 모습. 돔이 붕괴되어 있다.

 


일제에 의해 해체된 석굴암.


일제가 복원한 후인 1920년대의 석굴암.

그러나 당시 일본 실무진들은 대형 고대 석조 문화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했다. 당시 현지의 석공 장인들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이들을 공사에 참여시키지도 않았다. 현장의 조선인은 잡역 인부를 빼고는 모두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또한 조선인들도 완전히 잊고 있었던 석굴암의 '제대로 된 사진'이나 '기록'은 당연히 없었다. 복원 이전에 남아있는 사진, 자료들은 대체로 일본인이 남긴 것이다.게다가 복원공사를 하며 해체과정에 대한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았고, 사진조차도 제대로 남은 것이 없다. 남아 있는 사진과 자료들은 지금의 복원 작업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만약 있었다면 해방 후 보수공사마저 이런 식으로 하진 않았을 것이다.


보수공사 후 다 조립하지 못하고 방치된 석굴암 석재들.

만약 해체보수를 매뉴얼대로 제대로 했다면 이 석재들은 다시 제대로 조립되었든지, 아니면 최소한 어느 지점에 있던 몇 번 석재 같은 메모라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일제는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제대로 조사 기록을 남기지도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해체공사를 추진했다.

그뒤에 장면 내각과 박정희 정권 때 다시 재보수를 했지만 콘크리트를 떼어내도 모자랄 판에 그 위에 돔형으로 콘크리트를 다시 타설했다. 당시 유네스코에서 온 석조문화재 전문가까지 초빙해서 추진한 공사였으나, 우습게도 그 문화재 전문가는 결정이 난 뒤에야 국내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이건 안되겠다. 하면 안된다."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복구공사 취소 및 재설계로 입장을 바꿨다. 하지만 박정희는 그 조언을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 그 결과는 더 미칠듯한 내부 습기로 금세 나타났다. 이중 콘크리트 돔 사이에 들어있는 더운 공기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해서 여름이 되면 굴 내부의 상대온도와 상대습도가 급격히 낮아져 석굴 벽면에서 물이 흘러넘치는 수준이 되었다. 게다가 이 습기로 인해 내부에 이끼가 더 끼자 이를 제거한답시고 고압 증기를 이용한 세척 작업을 했다. 그 과정에서 훼손이 더 생긴 것은 당연한 일.

결국 서울대 기계공학과 김효경 교수가 투입되어 석굴암 내부를 완전히 밀폐하고 그 안에 에어컨을 계속 가동함으로써 습기를 제거하는 방법을 썼다. 이로서 일단 에어컨이 돌아가는 동안은 문제없는 상태가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에어컨의 미세한 소음과 진동이 수십, 수백년 계속되면 미세하게 훼손이 된다는 우려는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 밀폐와 에어컨 처리로 인해 석굴암은 본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완전통제구역이 되어버렸다. 본래 설계도만 봐도 참배객이 직접 석굴 안으로 들어와서 석굴암 본존불 주위의 10대 제자상과 11면 관음상으로 둘러진 방을 한 바퀴 돌면서 참배하는 구조임을 생각해 본다면 이렇게 입구를 틀어막아버리고 밀폐하는 건 원래 의미를 거의 잃어버리는 뼈 아픈 결정. 게다가 24시간 365일 내내 돌아가는 에어컨 작동이 잠깐이라도 중지된다면 지금도 바로 다시 습기 문제가 발생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 미봉책이었다. 하지만 일단 당장 생기는 습기는 제거해야 했기에 김효경 교수 팀은 완전 통제 및 에어컨 설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부처님 오신 날 하루만큼은 신자들을 위해 원래 용도대로 본존불 주변을 한 바퀴 도는 방식의 참배가 허용되는데, 이것도 문 열어놓고 에어컨 트는 격이라 자주 그러기는 어렵다.